샤넬은 자국인 프랑스에서는 나치 스파이 이력으로 인해 과대평가 논란과 함께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받는 인물이지만,
세계 패션 역사에, 특히나 여성복과 실용성이란 부분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로서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죠.
그런 그녀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Gabrielle Bonheur Chanel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남서부의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무척 가난했던 집안에서는 그녀를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겼다.
18세가 되던 해인 1901년, 물랭의 기숙학교로 가서 졸업한 후, 보조 양재사로 일하며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Coco Cahnel (코코 샤넬)
1909년 당시 교제하던 돈이 많은 집안 출신의 장교 에튀엥느 발장의 후원으로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 상점을 오픈했다.
1910년 그녀는 프랑스 상류 사회에 입문했다. 그리고 그해 파리 캉봉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라는 이름의 모자 전문점을 오픈했다.
발장과 헤어진 뒤 영국 출신의 청년 사업가인 아서 카펠과 교제를 시작했고 1913년 프랑스 휴양지인 도빌에 2호점을 오픈한다.
1915년 또 다른 휴양지인 비아리츠에 「메종 드 쿠튀르」(양장점)을 오픈하고 1916년 정식으로 첫 의상 컬렉션을 발표해 큰 성공을 한다.
1918년 쿠튀리에르(양장 재단사)로 등록하고 파리의 캉봉 31번지로 본점을 확장한다.
1921년 러시아 출신의 향수 제조가 어네스트 보와 함께 샤넬 No.5를 출시한다.
샤넬 No.5는 당시 유행한 아르데코 양식을 반영했으며 디자이너의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향수이다.
배우 메릴린 먼로가 "침대에서 무얼 입고 자냐?"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샤넬 No.5를 입는다."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같은 해에 그녀는 극작가 장 콕토, 화가 피카소,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등과 교류하며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1923년 영국의 웨스트 민스터 공작과 만나면서 그의 보석 애호 취미의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주얼리와 트위드 소재를 디자인에 활용하게 된다.
1924년에는 코스튬 주얼리를 1926년에는 리틀 블랙 드레스를 발표했다.
당시에 진짜 보석은 경제적인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샤넬은 진짜 보석에 인조 보석을 조합한 코스튬 주얼리를 통해 그녀만의 디자인 스타일로 활용했다.
1928년 최초의 트위드 슈트를 발표했다.
1939년 18세기 화가 와토의 그림 속 여성들이 입은 옷에서 영감을 받아 잘록한 허리와 폭넓은 스커트를 디자인했다.
스파이 활동과 이후의 디자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샤넬은 쿠튀르 하우스를 정리하고 프랑스 남부로 피신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넬은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딩클라게와 사귀면서 신변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나치의 스파이 활동을 한 것이 밝혀져 스위스에서 15년간 망명 생활을 한다.
1954년 파리로 돌아와 컬렉션을 발표했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반대로 미국과 영국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맞물리면서 호평을 받았다.
1955년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하고 미국 달라스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에 샤넬의 첫 번째 백인 2.55백을 론칭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올림픽 항공사의 승무원복을 디자인했고 1970년엔 향수 샤넬 No.19를 발표했다.
1971년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컬렉션을 준비하는 와중에 그녀는 88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었던 혐의로 인해 자국인 프랑스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Fashion changes, Style remains.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 가브리엘 샤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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